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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팀 역사

올림피크 드 마르세유 의 역사를 알아보자 제 1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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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림피크 드 마르세유 창단

 

프랑스의 프로 축구 클럽. UEFA 챔피언스 리그가 유러피언 컵에서 현재의 UEFA 챔피언스 리그로 개편된 원년에 우승을 차지하여 현재까지는 프랑스의 유일한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클럽이다 그 외 리그앙에서 9번 우승했고 쿠프 드 프랑스(프랑스의 FA 컵) 최다 우승 기록도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 전통의 명문 클럽이다.

또한 프랑스 내에서 가장 큰 축구 전용 구장인 오렌지 벨로드롬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홈 팬들의 뜨거운 응원 열기는 유럽 전체에서도 알아주는 편이다.

 

르네 뒤포르 드 몽미라이(René Dufaure de Montmirail)가 1892년에 창단된 종합 스포츠 클럽인 US 포세엔(US Phocéenne)를 축구 클럽인 푸트볼 클뢰브 드 마르세유(Football Club de Marseille)와 합친게 이 구단의 첫 역사이다. 1899년에 합쳐지면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고대 그리스인이 처음으로 마르세유에 발을 디딘 것을 기념해서였다고.

하지만 당시만 해도 프랑스 리그도 없고 축구 대회가 제대로 없어서 주로 럭비나 다른 종합 스포츠 클럽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차 대전 와중에 전사한 축구 선수들을 기리기 위하여 1918년에 비로소 축구 대회인 쿠프 드 프랑스(FA컵)가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마르세유는 쿠프 드 프랑스 첫 우승을 거둔 게 1924년이었고 이 대회 우승은 모두 10번으로 최다 우승팀이다.

리그앙 전신인 디비시옹 1에선 1936-37 시즌에 첫 우승을 거둬들였고 모두 9번 우승했다. 리그에선 정상급이었지만 1970-71, 1971-72 시즌 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한 유러피언 컵에선 당 시즌에 트레블한 아약스나 준우승한 유벤투스를 만나는 바람에 1차 예선에서 바로 탈락하였고 76년에는 2부 리그로 강등당하기도 했다. 1984년에 다시 1부 리그로 승격한 뒤 1986년에 베르나르 타피 사회당 의원[1]이 회장으로 취임하고 공격적인 투자를 시작하여 에릭 칸토나 등의 거물급 선수들을 영입하며 팀은 빠르게 성장했다. 거기에 프란츠 베켄바우어 레몽 후탈스 같은 정상급 감독들도 돈을 쏟아부어 영입했다.

1988-89 시즌에 다시 우승 타이틀을 획득하고 난 뒤에 1989-90 유러피언 컵에서 처음으로 4강까지 올라가 벤피카와 2:2 동률을 이뤘으나 원정 다득점으로 밀려 탈락했다. 1989-90 시즌 리그 연속 우승과 함께 또 다시 1990-91 유러피언 컵에 진출하여 준우승을 거둬들이면서 유럽 강호로 발돋움했다.

그리고 1990-91 리그도 우승하면서 연속으로 1991-92 유러피언 컵에 진출했으나 이번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스파르타 프라하에게 4:4 동률에서 원정 다득점으로 밀려 2회전에서 탈락하고 만다. 하지만, 유로피언 컵이 챔피언스 리그로 개편한 첫 1992-93 대회에서 결승까지 진출하여 밀란을 1:0으로 이기면서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대회 우승을 거두며 마침내 구단이 염원하던 빅 이어를 들어올리게 된다.

1992년 5월 5일, SC 바스티아 쿠프 드 프랑스 준결승 경기를 코르시카 섬의 아르망드-세사리 스타디움에서 펼칠 예정이었으나, 경기 시작 전 경기장이 무너지면서 19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나 경기가 취소됐다.

 

그러나, 마르세유의 영광은 승부조작 스캔들로 심각하게 얼룩지게 된다.

먼저 1992/93 시즌 마지막 경기 상대인 발랑시엔 FC와의 경기에서 발랑시엔 선수들이 자수하는 바람에 마르세유의 승부조작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발랑시엔 선수인 자크 글리스만이 감독인 보로 프리모락[4]에게 마르세유 선수인 장자크 에들리에게 자신이 매수당했다고 고백한 게 계기가 되어 드러났다. 이후 호르헤 부루차가, 크리스토프 로베르도 마르세유에 매수당했다고 고백하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들은 에들리가 발랑시엔 선수들에게 경기에서 져줄 것과 부상 위험을 줄여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마르세유는 5월 20일에 발랑시엔과 경기를 치르고 엿새 뒤에 챔스 결승전을 치르고자 했다. 이로써 이들은 손쉽게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유럽 정상을 노리겠다며 검은 돈을 사용한 것이다.

이에 대한 처벌로서 마르세유는 1994년 2부 리그로 강등되고 리그 우승 타이틀을 박탈당했으며, UEFA 챔피언스리그, UEFA 슈퍼컵, 인터컨티넨탈컵 등의 각종 국제대회 참가 자격을 박탈당했다.

또한 2006년 당시 마르세유의 선수인 장자크 에들리가 자서전에서 당시 루디 푈러를 제외한 선수 전원이 금지 약물을 도핑 후 경기에 임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UEFA는 공소시효인 10년이 지났다는 것을 근거로 무혐의 처분하였다. 또한 당시 도핑 테스트에서는 음성 반응이 나왔고 해당 자서전 발간 이후 마르셀 드사이를 비롯하여 동료 선수들 또한 논란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한편 결승 상대 팀이었던 밀란 관계자들과 팬들은 챔스 트로피를 돌려받아야겠다고 분노하기도 했지만, 마르세유가 도핑을 자행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당시 마르세유 선수들도 이를 강력하게 부인하였기에 그저 해프닝으로 그쳤다.

이후 마르세유는 2시즌이 지나서야 1부 리그로 올라왔고 리그 우승을 거두기 위하여 17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 1996년에는 농산물 판매재벌 로베르 루이드레퓌스가 팀을 샀다.

그 동안 리그 상위권으로서 챔피언스 리그에 꾸준히 진출했지만 93년 우승 이후로 챔피언스 리그 32강에서 늘 밀려나야 했다. 그나마 유로파리그 전신인 UEFA 컵 1998-99, 2003-04 시즌에서 준우승하면서 클럽 국제 대회에서 저력을 보여줬고 2010-11 시즌에 첼시 FC 다음으로 조 2위를 거두면서 11년 만에 챔피언스 리그 16강에 올랐다.

파리 생제르맹과 라이벌이다. 마르세유 거주민들 중 아랍  아프리카계가 많기 때문에 마르세유 서포터들과 선수들 중에도 그 쪽 출신이 많아서 프랑스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혐오감을 많이 받았고 인종 차별로는 알아주는 장 마리 르 펜이 여길 유달리 싫어하기로 유명했다. 또한 지네딘 지단도 아랍계로서 마르세유가 고향인지라 여기 소속이었다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지단은 여기가 아닌 지롱댕 드 보르도 소속으로서 리그앙에서 뛰었고 마르세유에선 뛴 적이 없다. 하지만 지단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열렬한 팬으로 유명하다. 마르세유 선수로 뛰는 것이 본인의 꿈이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해서 아쉽다고 밝힌 바 있다. 부진에 빠져있던 고향팀을 상승세로 바꿔놓은 비엘사 감독에게 고맙다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같이 그만큼 축구 열기는 엄청나서 과격한 응원 및 폭력 사태로 알아주기도 한다. 2009-10 시즌 리그 앙에서 모처럼 우승하자 마르세유에서 폭죽이 터지고 아주 열광적인 잔치 분위기였다. 이처럼 서포터들의 지지와 열기가 커서 리그 앙에서 꽤 안정적인 자본력을 가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009-10 시즌에는 한때 팀의 주장이자 레전드였던 디디에 데샹이 마르세유의 감독으로 부임하고 바로 그 시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이는 18년 만의 리그 우승이었다.

2010-11 시즌에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18년 만에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2011-12 시즌에는 챔스 조별리그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올림피아코스를 제치고 아스널 FC에 이어 조2위로 16강 진출에 성공한다. 그 후 FC 인테르나치오날레까지 잡고 19년만에 챔스 8강 진출이라는 대업을 이루지만 FC 바이에른 뮌헨에게 0-4로 박살이 나며 탈락.

리그에서는 시즌 10위로 마무리했다. 그나마 리그 컵인 쿠프 드 라 리그에서 올랭피크 리옹을 1-0으로 이기고 우승하면서 3연패 우승을 거두고 유로파 리그 진출권을 얻었다. 다만 FA 컵인 쿠프 드 프랑스에선 3부 리그 팀인 US 퀘빌리에게 덜미를 잡혀 4강에서 탈락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2. 라이벌
 
오늘날 위상은 좀 떨어진 편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리그앙을 주도해온 최강팀이었기 때문에, 다른 팀이 리그앙에 왕조를 구축하면 무조건 라이벌리가 걸린다고 보면 된다.

파리 생제르맹 FC와는 기본적으로 최대의 라이벌이다. 파리와 마르세유 간의 지역감정과 북부와 남부를 대표하는 팀이기에 더비 이름도 엘 클라시코에서 따온 르 클라시크다. 다만 파리의 창단 연도가 비교적 최근이라 이름과 달리 역사는 깊지 않은 편이다. 애초에 더비 이름 자체도 레알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의 인기를 등에 업은 라리가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리그앙의 부흥을 위해서 만든 명칭이기도 하다.

올랭피크 리옹과도 라이벌이다. 파리 생제르맹 FC가 2010년대 최강팀이자 남/북부의 대결이라면, 이쪽은 2000년대 최강팀이며 현재는 남부의 최강자를 놓고 겨루는 팀이기도 하다. 더비 이름은 양 팀 이름에 모두 올랭피크가 들어간 것을 이용한 'Choc des Olympiques'. 우리말로 하면 '올림픽 충돌' 정도라 할 수 있다.

그 외에 AS 생테티엔과도 라이벌리가 있으나, 생테티엔이 리그앙에 왕조를 구축한 것은 50년 전인 1960~70년대의 일인 데다가 이쪽은 마르세유보다는 같은 오베르뉴론알프 지역의 리옹과 더 라이벌리가 짙어서 오늘날에는 "그냥 라이벌리가 있(었)다" 정도의 수준이다.
 
 
 
 
3. 영구결번 선수
 
8시즌 동안 미드필더로서 변함없는 활약을 하였던 마티유 발부에나의 공로를 인정해 마르세유 구단은 2014년 8월 6일, 발부에나의 번호 28번을 영구결번으로 선정하였으나 15-16 시즌을 앞두고 발부에나는 여름 이적 시장을 통해 마르세유가 아닌 올림피크 리옹으로 이적하며 리그앙에 복귀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발부에나와 여자친구가 성관계를 갖는 영상이 범죄 조직에 의해 유출되었고, 카림 벤제마를 포함한 범죄자들이 이 영상을 빌미로 발부에나에게 금전을 요구하는 사건까지 겹치면서 영구결번에서 해제되었다.

위 사건은 발부에나가 피해자이기에 만약 리옹 이적이 없었다면 마르세유에서 영결 해제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머지 역사는 2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