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단 과 시련
바이에른 뮌헨은 뮌헨 체육 클럽(MTV 1879) 의 멤버들에 의해 1900년에 창단되었다. MTV 1879의 선수들이 1900년 2월 27일 집회에서, 축구부가 독일축구협회(DFB)에 가맹이 불가능해지자, 11명의 축구부 선수들이 MTV 1879에서 탈퇴하여 같은날 오후에 축구 클럽 바이에른 뮌헨(Fußball-Club Bayern München)을 창단하였다.
이후 바이에른은 지역 라이벌을 상대로 모두 대승을 거두었고, 1900-01 시즌 남독일 챔피언쉽 준결승전에 진출하였다. 이어지는 후년에 바이에른은 남부 지역 여러 리그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1910-11 시즌, 바이에른은 새로 출범한 바이에른 주의 1부 리그 크라이슬리가(Kreisliga)에 편입된다. 바이에른 뮌헨은 첫 해에 크라이슬리가 우승을 거두었지만,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몇년간 무관에 그쳤고,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전체의 축구 활동이 중지되었다.
이후 바이에른은 1926년, 남독일 챔피언쉽이 출범하기 전까지 몇기의 지역 우승컵을 들어올렸으며, 28년에도 지역리그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바이에른이 공식 기록상 처음으로 획득한 우승 타이틀은 1932년의 리그 우승으로, 리카르트 콘(Richard "Little Dombi" Kohn)은 바이에른을 이끌고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당시 독일 챔피언쉽 결승에서 2-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독일이 나치 휘하의 암흑기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창단 멤버들에 유태인이 여럿 있기에, 1930년대 나치에게 구단 간부들이 강제로 해임당하기도 했다.(그런데 독일 및 여러 유럽 축구단에 유태인들이 연루되던 게 꽤 많다. 이를테면 2007년 분데스리가 우승한 슈투트가르트는 아주 초창기에 유태인 구단이라는 별명을 가졌고, 구단 마크가 다윗의 별이 들어가기도 했으니) 이 조치에 구단은 저항했지만, 히틀러 나치즘은 바이에른을 '유대인 클럽'이라고 조롱하며 분쇄했다. 클럽의 간부진 및 서포터즈의 열혈 회원 중에서 유대인은 속속 빠져나갔다. 다행히 국경을 넘어간 사람도 있지만 커트 란다우어 당시 클럽 회장처럼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도 있었다. 남부리가를 호령했던, 강력했던 바이에른은 그렇게 추락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바이에른은 남부 오베르리가에 속해있었다. 당시에는 통합된 리그가 없는, 총 5개로 나눠진 각 지방 리그 체제였으며, 남부 오베르리가 또한 독일의 1부 리그였다. 바이에른 뮌헨은, 1945년에서 1963년까지 13명의 감독을 해임하며 암흑기를 보냈다. 1955년에는 2부 리가로 강등되었지만 1시즌만에 복귀했고, DFB-포칼 결승에서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를 1-0으로 꺾으며 창단 후 첫 우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당시 바이에른은 심한 재정난을 겪었고, 결국 1950년대에는 부도 크리까지 맞는다. 롤란트 엔틀러(Roland Endler)는 재정 지원을 하였고, 4년간 구단의 회장직을 맡았다. 1963년, 독일의 오베르리가는 단일 1부 리그인 푸스발-분데스리가(Fußball-Bundesliga)로 통합되었다. 이때, 출범 멤버로 각 지역의 5개의 오베르리가 팀이 3~4팀씩 포함되는데, 바이에른은 남부 1부 리그 3위로 마쳤지만, 같은 뮌헨을 연고로 한 지역 라이벌인 TSV 1860 뮌헨이 오베르리가 우승을 거두었다. 독일 축구협회는 같은 연고지의 2팀을 1부 리그에 넣는 것을 거부함에 따라, 바이에른 뮌헨은 1963년 분데스리가의 출범 멤버에 들지 못한다. 바이에른 뮌헨은 그로부터 2년 후에 분데스리가로 승격했다.
2. 첫 우승과 황금기
그렇게 바이에른은 서독의 통합 리그인 분데스리가의 출범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1부리그 멤버로 초대받지 못했고, 2년 후에, 프란츠 베켄바우어,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등을 앞세워 1부리그로 올라온다. 분데스리가로 승격된 첫 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리그 3위의 호성적을 거뒀고 DFB-포칼 우승을 가져갔다. 독일 컵 우승으로 인해서 UEFA 컵위너스컵 출전권을 획득했고, 레인저스와의 결승전에서 프란츠 로트의 극적인 추가 시간 골로 1 - 0 승리를 거두고 우승했다. 1967년, 바이에른 뮌헨은 다시 한번 DFB-포칼에서 우승했지만, 전반적인 과정이 실망스러웠고 즐라트코 차이코프스키 (Zlatko Čajkovski)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이 된 브란코 제베치 (Branko Zebec) 감독이 부임했다.브란코 제베치 감독은 공격적인 스타일의 축구를 선보였으며 1968-69 시즌,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DFB-포칼까지 우승하며 더블을 기록했다.
1970년대 초중반에 들어와 분데스리가는 바야흐로 '바이에른 천하' 시대를 맞는다. 우도 라테크 감독이 부임했다. 우도 라테크는 첫 시즌에 DFB-포칼 우승을 이루어냈다. 1971-72 시즌에는 분데스리가에서 우승했는데, 이 우승이 결정지어진 경기는 샬케 04와의 경기였는데, 1972 뮌헨 올림픽을 위해 지어진 뮌헨 올림피아 슈타디온에서 펼쳐진 첫 경기임과 동시에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초의 TV 중계가 이루어진 경기였다. 바이에른 뮌헨은 5 - 1 로 승리하고 챔피언이 되었다. 이 시즌은 최다 승점 기록과 최다 골 기록을 세운 역사적인 시즌이었다. 이후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 사상 첫 3연패(1971-72 시즌, 1972-73 시즌, 1973-74 시즌)의 위업을 달성했다. 또한 3년 연속 유로피언 컵우승을 차지하며 그 절정을 맞았다. 그러나 유러피언 컵 3연패 과정이 그리 순탄치 많은 않았다.
1973-74 시즌 첫 번째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붙었다. 그러나 좋지 않은 경기가 펼쳐졌고, 경기가 종료되기 직전까지 0 - 1 로 끌려가고 있었으나, 한스-게오르그 슈바르첸벡의 극적인 동점골로 재경기를 가지게 된다. 이 경기에서는 게르트 뮐러와울리 회네스가 각각 2골씩 터뜨리며 4 - 0 으로 손쉽게 승리했다. 추후에 울리 회네스 같은 레전드들은 이 경기가 바이에른 뮌헨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 중 하나였다고 평했다. 1974-75 시즌 도중인 1월에, 바이에른이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자 구단주는 팀의 중흥을 가져온 우도 라테크 (Udo Lattek)를 경질하고 데트마어 크라머(Dettmar Cramer) 를 새로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이 시즌의 리가는 10위로 마무리하였으나 , 유러피언컵에서는 지속적인 성공이 이어졌다. 1974-75 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리즈 유나이티드와 붙었고, 프란츠 로트와 게르트 뮐러의 골로 승리했다. 빌리 브렘너를 중심으로 한 전성기의 리즈 유나이티드를 꺾으며 우승하였고, 그 다음 시즌의 유러피언컵 출전권을 확보하였다. 1975-76 시즌의 리그 성적은 3위였으나, 이 시즌에도 유러피언컵을 우승하였다.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홀로 세 골을 몰아친 게르트 뮐러의 활약으로 합계 3 - 1로 꺾었고, 햄든 파크에서의 결승전에서 AS 생테티엔을 '프리킥 스페셜리스트' 프란츠 로트의 결승골로 꺾으며 유로피언 컵 3연패에 성공한 바이에른 뮌헨은 빅 이어를 영구 소장하게 되었다.
3. 뮌헨 올림피아 슈타디온 시대
1972년 5월 26일 개장한 뮌헨 올림피아 슈타디온은 1972 뮌헨 올림픽을 대비해 뮌헨 올림피아 파크 내에 건축된 경기장으로 6만 9천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1972-73 시즌 분데스리가부터 2005년 여름 새로운 홈구장 알리안츠 아레나로 옮기기 전까지 33시즌동안 바이에른의 홈구장으로 쓰이며 고락을 함께 했다. 독일의 명건축가 귄터 베니쉬와 프라이 오토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사상 최초로 강철 케이블에 지탱되어 안정된 거대한 아크릴 유리 덮개를 설치한 신선하고 혁신적인 구조에 당시 최첨단 시설등을 갖춘 경기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한쪽 면은 완전히 개방된 형태라 겨울에 경기를 관람하게 매우 추웠고, 관중석 절반 정도는 아예 지붕으로 덮여있지 않아 비, 눈등의 악천후에 그대로 노출되는 등 여러 애로사항이 알록달록 꽃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종합경기장이다보니 피치와의 거리가 너무 먼 것등이 계속해서 문제가 되어 추후 알리안츠 아레나가 신규 건립되게 되는 원인이 된다
4.침체기와 FC 브라이트니게
70년대말 구단은 적자의 늪에 허덕이며 졸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크라머를 경질한 구단은 헝가리의 로란트 줄러(Lóránt Gyula)를 감독으로 앉혔고, 역시 이는 분위기 반전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76-77 시즌에는 리그를 7위로 마무리하였고, 그 다음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최악의 분데스리가 성적인 12위를 기록하였다. 바이에른 수뇌부는 결국 로란트를 경질, 수석코치였던 체르너이 팔 (Csernai Pál) 에게 감독직을 맡겼다.
주전 선수들의 이탈도 이어졌다. 팀의 주장이자 상징 프란츠 베켄바워는 1977년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했고, 전설의 수문장 제프 마이어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은퇴한데다, 인대부상에 시달려오던 울리 회네스마저 회복에 실패하고 조기 은퇴를 결정한다. 거기다 팀의 득점을 책임지던 '폭격기' 게르트 뮐러마저 포트로더레일 스트라이커즈로 이적했다.
1980년대에 들어 팀은 재정난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보드진의 다수가 교체됐다. 부상으로 인해 조기에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울리 회네스 (Uli Hoeneß) 를 구단 보드진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부상으로 조기 은퇴한 울리 회네스는 미국으로 건너가 스포츠 마케팅 관련 공부를 했다. 그 이후 바이에른 뮌헨에 돌아와 미국의 스포츠 마케팅 방식을 적용하게 된다. 바이에른 뮌헨에 메가 스토어를 설치하고, 자국 내 기업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도 이때부터다. 특히 이 메가 스토어는 대단한 혁신이었는데, 머천다이징을 전문적으로 행한 첫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포터들의 구단' 이라는 인식을 계속해서 심어주어 이미지 형성에 노력하게 된다. 또한 바이에른 주에는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많이 몰려있는데 그 기업들이 모두 바이에른 뮌헨의 공식 파트너가 되는데 이것도 울리 회네스가 주도했다. 결국 구단은 기사 회생에 성공하였다. 그의 마케팅 방식은 여기에 나와있다.
이렇게 기사 회상한 바이에른 뮌헨은 1980년대 분데스리가에서 독주하기 시작하고 10년간 7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반면 같은 시기에 유럽 무대에서의 성적은 썩 만족스럽진 않았다. 1981-82 시즌과 1986-87 시즌 두 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올랐으나 둘 다 준우승에 그쳤다. 1981-82 시즌 결승전에는 아스톤 빌라와 결승전에서 만났는데 경기 내내 압도하다가 뜬금포 한 방에 무너졌고 1986-87 시즌 결승전에선 포르투에게 경기 내내 1골차로 리드하다가 막판에 79분이랑 81분에 연속골을 얻어맞고 역전패했다.
또한 1980년대의 바이에른은 공격과 수비의 핵심인 칼 하인츠 루메니게와 파울 브라이트너 에게 의존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의 바이에른은 'FC 브라이트니게 (FC Breitnigge)' 라고 불릴정도로 둘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5. FC 할리우드 시절..
1987년 부임한 유프 하인케스 체제 하의 바이에른은 리가 2연패를 성공하지만 1990년대 들어 노쇠한 주축 선수를 떠나보내며 전력이 약화되었고, 클럽은 위기를 맞았고 1990-91 시즌에는 준우승을 차지했으나 1991-92 시즌에는 10위를 기록하며 체면을 구겼다. 이는 강등권과 승점이 겨우 5점차밖에 나지 않는 부진이었다. 유프 하인케스는 경질되었고, 1993-94 시즌 UEFA컵에서는 2라운드에서 노리치 시티 FC에게 홈에서 덜미를 잡히며 조기 탈락의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프란츠 베켄바워가 94년 1월에 임시감독을 맡음에 따라 바이에른 뮌헨은 화려하게 부활하며 다시금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기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대행을 이어 새로 감독이 된 조반니 트라파토니와 오토 레하겔 감독은 당시 벼락부자가 되어 막강한 선수를 쓸어담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대결에서 힘을 쓰지 못하며 패배했고, 각각 1시즌씩 무관으로 끝냈다.
1995-96 시즌 막판에 팀의 부진을 보다 못한 베켄바워는 또다시 임시 감독직을 맡았고, 결승에서 지롱댕 보르도를 꺾고 팀의 UEFA컵 우승을 이끌어냈다. 정말 이쯤되면 이 사람이 트로피를 부르는건지 구분이 안갈 정도다. 그리고 또다시 감독직이 조반니 트라파토니에게 넘어갔다. 그나마 조반니 트라파토니는 1996-97 시즌에 팀에게 3년만에 리그 우승을 선사했으나 같은 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무려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해버려서 복수하는 느낌이 제대로 들지도 않았다. 이 시즌 도르트문트는 유벤투스를 꺾고 챔스 우승을 했는데, 그 장소가 다름아닌 바이에른의 홈구장 올림피아슈타디온 뮌헨이었다. 다음 시즌에는 승격팀 1.FC 카이저슬라우테른에게 패배하는등 고전이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이 때 카이저슬라우턴 감독은 바이에른에서의 처참한 실패를 경험했던 오토 레하겔이다.
이 시기, 선수들은 형편없는 경기력에 반해 그라운드 밖에서 소란을 자주 피우는 등, 스포츠지보다 촌평지에 등장하며 FC 할리우드 (FC Hollywood)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획득하였다. 1998년 3월 10일, 선수들의 태도에 빡친 조반니 트라파토니는 분노의 인터뷰를 하였다. 근데 문법이 이상하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자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은 사임하였다.
나머지 역사는 2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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