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오트마어 히츠펠트 시대(1988~2004)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바이에른 뮌헨의 지휘봉은 라이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최전성기를 이끈 명장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이 맡게 된다. 히츠펠트가 부임한 첫해, 바이에른은 분데스리가 정상에 올랐고 DFB-포칼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했다. 다음해 바이에른은 리그[9]와 독일컵 타이틀을 차지하며 더블을 기록했고 2001년 다시금 리그를 제패, 분데스리가를 3년 연속으로 우승했다.
그동안 부진했던 유럽대항전에서도 기세가 엄청났다. 부임 첫 시즌 1998-99 시즌, 바이에른은 조별리그에서 FC 바르셀로나를 침몰시킨데다 토너먼트에서 안드리 셰브첸코가 이끌던 디나모 키예프까지 꺾으며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진출하지만,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후에 '캄프 누의 비극'이라 명명된, 비극적인 패배를 당하며 준우승에 머무른다. 전반 6분만에 마리오 바슬러가 강력한 땅볼프리킥으로 피터 슈마이켈을 무너뜨리며 앞서간데다 경기 내내 메멧 숄을 필두로 맨유 수비진을 농락하며 골대만 3번 때리는 등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줬으나, 후반 91분과 93분 두번의 코너킥 상황에서 테디 셰링엄과 올레 군나르 솔샤르에게 실점해 4번째 빅이어를 눈앞에 두고 종료직전에 믿기지 않는 통한의 역전패를 당했다. 그라운드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주장 올리버 칸과 사무엘 쿠포르의 통한의 절규는 바이에른 뮌헨 팬들로서는 눈물없이 볼 수 없었던 장면이자 기억하기도 싫은 장면이다.
7.2000-01 시즌, 25년만의 UCL 우승 !!
그리고 2년 뒤의 2000-01 시즌의 바이에른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바이에른은 '게르만의 혼' 로타어 마테우스가 은퇴했지만 주장인 '미친 호랑이' 슈테판 에펜베르크와 '거인' 올리버 칸을 중심으로 절치부심했다. 뿐만 아니라 비셴테 리사라수와 지오반니 에우베르의 부상 결장을 고려하더라도 결승전 선발 멤버 중 사무엘 쿠포르를 제외한, 벤치 멤버 중 알리 다에이와 하산 살리하미지치를 제외한 전원이 독일인으로 채워져 있었던 2년 전과는 달리 윌리 사뇰과 파울루 세르지우 등 거물 용병을 영입하고 오언 하그리브스등 유망주를 성장시키며 더욱 강해졌다.
시즌 초반에는 사무엘 쿠포르, 파트리크 안데르손, 토마스 링케 등으로 이루어져 있던 수비진이 흔들리며 리그에서 휘청였고, DFB-포칼은 2라운드에서 1. FC 마그데부르크에게 승부차기 끝에 탈락하며 좋지 못했다.
그러나 챔피언스리그에선 바이에른은 조별 예선에서 아스날 FC을 1승 1무로 제압하며 기세를 과시했고, 8강에서 2년 전 통한의 아픔을 안겨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홈 / 원정에서 모두 털며 4강에 진출했다.[10] 4강에서 만난 레알 마드리드도 홈/원정 모두 승리를 거두며 결승에 진출했다. 산 시로에서 열린 결승전 상대는 작년에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아깝게 고배를 마신 발렌시아 CF였다. 에펜베르크와 멘디에타가 PK로 한 골씩 기록하며 1:1로 승부차기까지 간 이 접전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중 유일하게 PK로만 득점이 난 경기로 기록이 되어 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가장 긴장감 넘치는 승부차기로 불리어지는 이 혈투에서 양팀 모두 7번째 키커까지 나온 끝에 끝에 PK를 3개나 선방해 낸 올리버 칸의 활약에 힘입어 PK 스코어 5:4로 25년만에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2000-01 시즌, 분데스리가에서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2000-01 시즌 분데스리가, 당시 33라운드의 순위표이다. 1위 바이에른 뮌헨과 2위 샬케 04 간의 승점 차이는 3점이었다. 득실차는 샬케 04가 앞서고 있었다. 마지막 34라운드에서 바이에른 뮌헨은 함부르크 SV를 상대하고, 샬케 04는 SpVgg 운터하힝을 상대했다. 그리고 두 경기는 같은 시간에 진행되었다. 샬케의 경기가 먼저 끝났다. 샬케 04는 5 : 3 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뮌헨은 함부르크 SV와 0 : 0 으로 비기고 있었다. 경기 시간은 90분을 지나고 있었다. 그 때, 함부르크의 세르게이 바르바레즈가 선제 헤딩 골을 넣는다. 샬케 04 팬들은 환호하며 운동장으로 뛰쳐나왔고, 우승을 확정한 듯한 분위기였다. 반면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화난 표정을 지었고, 오트마어 히츠펠트는 고개를 가로 지었다. 울리 회네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주심은 4분의 추가 시간을 주었다. 바이에른 뮌헨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다.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파울루 세르지우에게 공을 띄워 주었다. 하지만 파울로 세르지오의 마크맨이었던 토마스 우이팔루시는 골키퍼에게 백패스를 했다. 그런데 골키퍼가 공을 잡았다! 바이에른의 벤치에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반칙!" 간접 프리킥이 주어졌고, 이것은 바이에른 뮌헨의 마지막 찬스였다. 슈테판 에펜베르크와 파트리크 안데르손이 프리킥 준비를 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이스터샬레는 샬케 04에게 돌아갈 터였다.
7. 펠릭스 마가트 시대 ..
오트마어 히츠펠트가 물러난 후 후임 감독은 '마가트 유치원' 스쿼드 구축으로 VfB 슈투트가르트의 리가 준우승을 이끈 펠릭스 마가트. 그는 바이에른 감독 부임 후 2004-05, 2005-06시즌을 연속해서 더블로 우승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독일 클럽 사상 최초의 연속 더블 우승이기도 하다.
이렇게만 보면 마가트도 뮌헨의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안 그렇다. 마가트가 나쁜 평가를 받는 이유는 2006-07 시즌 워낙 죽을 쒀서 그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바이에른을 말아먹은 건 아니었다. 게다가 2004-05 시즌의 승점 77점 우승은[14] 2011-12 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경신하기 전까진 최다 승점 우승이었다. 하지만 독재자 타입의 감독인데다 선수들에게 혹독한 체력 훈련을 감행했고, 워낙에 특이한 규정을 많이 만들어 선수단과 마찰도 많았고, 결과적으로 바이에른의 UEFA컵행을 이끈 흑역사로 남았다. 실제로 마가트의 별명은 사담 마가트 (마가트+사담 후세인), 크밸릭스 (Quälix) (이름 Felix와 괴롭히다 라는 뜻을 지닌 quälen의 합성어)였다.
또한 히츠펠트에 비해 유럽대항전 성적이 신통치 않았는데, 마가트 첫 시즌에는 조별리그를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다비드 트레제게 등이 버티는 유벤투스에게 밀려 2위로 진출해 바로 아스날 FC를 만났으나 올리버 칸의 어시스트 등 떡대 플레이로 그냥 밀어붙여 꺾더니 8강에 올라갔다. 그러나 8강 상대는 이제 막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투자가 시작된 첼시 FC였고, 프랭크 램파드에게 환상골을 허용하는 등 원정에서 4대2로 패한 것을 뒤집지 못하고 합계 5 - 6로 패했다. 홈 승리도 2대1로 밀리다가 막판에 가서야 메멧 숄과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등이 억지로 우겨넣은 골이라 완패였다고 할 수 있다.
05-06 시즌에 유벤투스를 또 만나 이번에는 1승 1패를 거뒀으나 뮌헨전 외에는 무패였던 유벤투스에 비해 브뤼헤 원정에서 무승부를 거두고 말았고, 그 대가로 지난 시즌 준우승팀인 밀란 제네레이션 2기의 AC 밀란을 만나버렸고, 뮌헨 킬러 필리포 인자기와 쉐도르프 등에게 맹폭을 당하며 산 시로 원정에서 4대1로 발렸다. 그나마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장거리에서 냅다 때린 것을 디다가 불안정하게 처리해 게레로가 주워먹어서 1골 넣었을 뿐. 홈에서는 미하엘 발락이 환상골을 넣긴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이렇듯 히츠펠트 말기의 부진에서부터 마가트 시대, 그 이후의 클린스만까지, 바이에른의 위상과 맞지 않게 조기 탈락이 이어졌다. 2001 - 2002 시즌 4강 진출 이후 거의 10년간 8강 이상을 뚫지 못하는 부진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럽대항전 경쟁팀들에 비해 돈을 쓰지 않는 보드진들을 비관한 팀의 중원사령관 미하엘 발락은 재계약을 거부하고 자유이적으로 첼시 FC로 이적하고 만다. 이 공백을 극복하지 못한 뮌헨은 06-07 시즌 멸망하며 챔스 진출권을 잃는다.
2005/06 시즌을 앞두고 바이에른은 1972년부터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정든 뮌헨 올림피아 슈타디온을 떠나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도시 북쪽에 새로 준공한 66,000석의 알리안츠 아레나로 자리를 옮긴다 (추후 69,000석, 71,000석으로 좌석이 확대된다.). 최첨단 시설과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경기장 외벽 색깔을 바꿀 수 있는 이 경기장이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대적인 스포츠 경기장으로 꼽히고 있다.
만능의 중원 사령관 발락을 필두로 헌신적이며 다재다능한 제호와 하그리브스, 최고의 재능 다이슬러의 등장, 마카이의 결정력과 기동성, 그리고 살리하미지치와 메멧 숄 등의 베테랑들, 그리고 레전드 골리 올리버 칸이 버티는 골문 앞에 루시우, 필립 람, 윌리 사뇰, 그리고 데미첼리스 등으로 벨런스 자체는 괜찮은 시절이었다. 유럽대항전 경쟁자들에 비하면 한수씩 떨어진다는게 문제였다.
그리고 이어진 2006-07 시즌에 제대로 문제가 터졌는데,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발락이 떠나자 마르크 반 봄멜로 이를 메우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하그리브스는 맨유 보내달라고 꼬장을 부리지, 예레미스는 무릎 부상만 계속 당하다 은퇴했지, 다이슬러는 매일 누워있지, 새로 사온 유망주들은 똥이나 싸대지, 여기에 함부르크에서 맹활약하던 젊은 피 다니엘 반 부이텐이 수혈된 수비진은 레전드 골키퍼 올리버 칸이 버티고 있음에도 안정감이 뚝 떨어졌으며, 산타 크루즈와 피사로의 득점력도 급감했다. 그나마 월드컵에서 대활약해서 희망이 보였던 루카스 포돌스키는 애국자답게 시즌 7골밖에 안 넣으며 그 기대를 씹었다.
2006-07 시즌이 진행되며 빌레펠트, 볼프스부르크, 하노버 96에게도 패하고 베르더 브레멘 원정은 3:1 패배를 당하면서 11경기 만에 4패를 당해 5위에 머물렀다. 팬들은 Magath raus!(마가트 나가라!)를 외치고, 겨울 이적 시장에서 곧바로 모가지가 잘릴 듯 했던 마가트는 겨울 휴식기 전까지는 일단 리그에서 7경기 무패를 달리며 일단 위급한 불을 끈데다 챔스에서는 인테르 원정에서도 행운의 승리를 거두는 등 무패로 조 1위를 했기에 일단 보드진은 후반기 결과를 지켜보기로 하고 마가트에 대한 신뢰를 표명했다. 그러나 포칼 8강에서 승격팀인 알레마니아 아헨에게 뜬금없이 어이없게 탈락하더니 후반기 첫 경기였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원정에서 3대2로 패했고, 승격팀인 보훔에게도 홈에서 눈이 썩는 경기력으로 0대0으로 비기자 결국 보드진은 바로 모가지를 치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펠릭스 마가트는 시즌 중이던 2007년 1월 31일 자로 해고되었다. 마가트의 뮌헨 경력은 그렇게 2년 반만에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8. 히츠펠트 2기
팀이 여전히 4위에 머물러 있자 절체 절명의 위기에서 오트마어 히츠펠트가 급히 팀을 구하기 위해 부임했다. 시작은 매우 불안했는데, 뉘른베르크 원정에서 0:3 참패를 당했고, 히츠펠트 1기 시절 포칼에서 충격의 탈락을 안긴 알레마니아 아헨에게 또 패했다. 그러나 차츰 팀을 수습한 히츠펠트호는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라울 곤살레스, 데이비드 베컴, 뤼트 판니스텔로이 등이 포진하고 '우승 청부사'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를 피 말리는 혈투 끝에 홈에서 로이 마카이가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최단시간 골인 10.5초 만에 골을 기록하며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꺾고 올라갔다. 특히 1차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의 2:3 패배는 뮌헨과 레알의 역대 최고의 명경기로 꼽힌다. 라울 - 반니 투톱의 화력과 뮌헨의 역습의 대결이었고, 뮌헨은 패배했으나 종료 직전 마르크 판보멀이 멋진 중거리로 추격골을 넣으며 2차전의 희망을 만들어냈고 결국 이 골 덕분에 홈에서 2:1 승리로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레알을 꺾고 8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런데 8강에서 천적 AC 밀란을 또 만났고, 1차전 원정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기대감을 높였으나 홈에서 0:2로 떡실신하며 탈락했고, 분데스리가에서도 순위를 회복하나 했으나 후반기 막판에 슈투트가르트전 완패, 함부르크전 패배로 브레멘과의 승점차가 6점으로 벌어져 결국 UEFA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자력으로 장담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였고, 우려는 현실이 되어 4위로 쳐지며 UEFA컵에 나가게 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2007-08 시즌 다시금 오트마어 히츠펠트의 지휘 아래 슈투트가르트에게 뺏긴 우승컵을 되찾기 위해 루카 토니, 미로슬라프 클로제, 프랑크 리베리 등을 영입하는 분노의 영입 시즌 1을 보여주며 2위와 승점 10점 차이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분데스리가와 DFB-포칼에서 더블을 기록하며 체면치레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통산 20회 분데스리가 우승으로 차기 시즌부터 엠블럼 위에 별 4개를 달 자격이 생겼다. 해축팬이라면 잘 아는 바이에른 뮌헨 엠블럼 위의 4성은 이 때부터 달기 시작했던 것이다.
클럽 레코드를 경신하며 데려온 리베리는 곧바로 분데스리가 올해의 선수상 등을 휩쓸며 팀의 핵심이 되었고, 여기에 토니 - 로제 라인이 가동되어 이타적인 성향의 클로제와 세리에 득점왕 출신의 토니가 케미를 발휘해 둘이 60골을 넣는 엄청난 화력으로 UEFA 컵과 분데스리가를 휩쓸었다. 올리버 칸은 은퇴 전 마지막 시즌임에도 연륜이 묻어나는 안정감으로 뒷문을 굳건히 잠궜고, 중원의 제호베르투와 판보멀의 적절한 조합에 서브로 나쁘지 않았던 오틀, 새로 합류한 하밋 알틴톱과 마르셀 얀센 등의 적절한 활약이 조합되어 승승장구했다. 포지션상 애매한 자원으로 남은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와 여전히 신통치 않은 루카스 포돌스키의 활약 등이 그나마 옥의 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UEFA컵에서는 16강까지는 안데를레흐트, 에버딘 등에게 6~7골을 퍼부으며 8강에 진출한 바이에른은 헤타페에게 탈락 직전까지 갔다가 극장 경기 끝에 극적으로 4강에 진출했는데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에게 2차전 원정에서 안드레이 아르샤빈에게 농락당하며 4:0 대패를 당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미니 트레블에는 실패했다.
9. 위르겐 클린스만 시대와 하인케스 2기 ..
위르겐 클린스만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2008-09 시즌은 말 그대로 "역사스만 시대"라고 불리는 암흑기 그 자체였다. 브레멘에게 홈에서 믿기지 않는 5대2 대패를 당한다거나, 그라피테 - 에딘 제코 - 미시모비치 삼각 편대를 앞세운 볼프스부르크에게 원정에서 5 - 1로 대패하는 등 철저히 밀리면서 시즌 내내 단 한 번도 리가 선두를 달리지 못하는 부진의 연속이 이어졌다. 그래도 전반기는 막판 11경기 무패를 달리며 돌풍의 승격팀 호펜하임과 동률의 승점으로 마쳤지만 윈터브레이크 후 맞은 후반기가 시작되자마자 4경기 중 3경기에서 함부르크, 헤르타 베를린, 쾰른에 차례로 패했다. 급기야 26라운드 볼프스부르크 원정은 위에 나온 것처럼 처참한 경기력 끝에 굴욕스러운 대패를 당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번번히 대기권으로 날아가는 공격진의 슈팅, 지난 시즌 주전급으로 부상했으나 결국 부족한 기량으로 대량 실점하면서 경기마다 데미첼리스와 함께 삽질 1순위로 지목되며 구멍화된 크리스티안 렐 등 총체적 난국이 이어진데다, 올리버 칸 은퇴 후 생긴 골키퍼진의 구멍도 미하엘 렌징이 처참한 폼을 보여주며 삽질만 줄창 반복되어 더욱 위태로워만 보였다. DFB-포칼도 8강에서, 리그에서 엎치락 뒤치락 싸우던 레버쿠젠에게 4대2로 참패를 당했다. 그나마 토니 - 로제 라인은 밥값은 했으나 번갈아 부상을 당하며 듀오 구성이 어려워졌고, 지난 시즌 폭발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던 알틴톱이 장기 부상을 끊으며 극심한 부진을 보인데다, 보로프스키도 포스트 발락의 역할을 하기엔 무리였다. 리베리도 두자리수 골을 넣었지만 부상에 시달리며 시즌 3~40%는 날렸고, 그나마 슈바인슈타이거가 유로 때의 플레이 스타일을 그대로 옮겨와 뜬금없이 9골을 넣었으나 팀의 상황을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장 심한 문제가 렌징이었는데, 칸 은퇴 전에 서브로 나올 때는 몇 번씩 멋진 선방을 보여주어 멋지게 대체제가 되나 했으나, 페이크였다. 마치 장갑에 기름을 바르고 출전하는 듯한 경기력으로 후반기부터는 한스-외르크 부트에게 주전 자리를 내 줬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조별리그를 1위로 가볍게 돌파한데다 16강에서는 스포르팅 리스본을 원정에서 5 - 0, 홈에서 7 - 1 로 대파하여 도합 12 - 1이라는 엄청난 점수차로 격파하며 8강에 진출했으나, 주전 수비 3명이 부상당한 채 렐 - 브레누 등 유망주와 하락세가 뚜렷하던 오또를 긴급 투입시켜 치른 8강에서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끄는 FC 바르셀로나에게 원정에서 4 - 0으로 대패하는 등 처참한 패배를 당하며 합계 5 - 1로 탈락한다. 세대교체는 커녕 뮌헨 본연의 성적도 거두지 못하자 가시방석에 앉은 듯 하던 클린스만은 29라운드 샬케 04에게 홈에서 패하며 UEFA 컵으로 떨어지는 4위로 쳐지자 결국 바이에른 뮌헨 보드진은 시즌 종료 무렵에 가차없이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모가지를 쳤다.
천만다행으로 시즌 막판, 은퇴 후 야인으로 지내던 유프 하인케스가 감독으로 부임하여 잔여 경기들에서 승리를 거둬주었다. 88년부터 92년까지 4년간 뮌헨을 이끌며 두 차례 리그 우승을 거둔 하인케스의 두 번째 뮌헨 부임이었다. 잔여 경기 5경기에서 4승 1무를 거두며 팀을 도로 분데스리가 2위를 이끌며 차기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직행에 성공했지만 시즌은 무관으로 끝났다. 32라운드에서 선두 볼프스부르크와 승점 동률이었으나 33라운드 호펜하임 원정에서 무승부를 거두면서 승점 2점차로 벌어졌고 최종전에서 승점 동률인 3위 슈투트가르트와 홈에서 단두대 매치를 벌어야 했다. 만일 패배할 경우 4위 헤르타 베를린이 강등권 카를스루에에 이기면 2006-07 시즌과 마찬가지로 4위로 챔스에 못 나가는데, 다행히 2-1로 승리하며 자력 2위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1위 볼프스부르크가 패할 경우 역전 우승도 가능했으나 포칼 결승을 앞두며 힘 빼고 나온 베르더 브레멘에 5-1 대승을 거두면서 그럴 일은 없어졌다.
애초에 필립 람이 자서전에서 디스했듯 클린스만의 감독 스타일은 지략가 타입이 아닌 팀에 사기를 불어넣거나 훈련 방식과 스트레스 관리, 선수 복지 등에 주로 관심을 가지는 스타일이었다. 감독 경력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성공적으로 세대교체 시켜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 3위에 올려놓은 것 뿐이었고, 클럽 경력은 전무했다. 그나마 그 3위도 전술적인 부분은 요아힘 뢰프 수석코치가 알아서 했지 클린스만이 뛰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2006년 월드컵에서도 그러했듯 노장 선수들과의 불화도 잦았고, 엽기적인 훈련 방식 탓에 선수들의 불만도 쌓여갔다. 뮌헨 보드진은 독일 대표팀의 10년여간 이어지던 오랜 부진을 씻고 유망주들을 대거 발굴해 세대교체에 성공한 클린스만이 뮌헨에서도 그런 리빌딩을 해 주기를 바랐겠지만, 클린스만은 그 정도 역량이 있는 감독이 애초에 아니었던 것이다. 어설프게 베테랑 대신 주전급으로 기용하던 어린 선수들은 큰 경기에서 멘탈부터 무너지며 대량실점을 내주기 일쑤였고, 팀 벨런스 자체가 붕괴되고 말았다. 뮌헨에서의 3년 내내 애국자 모드만 보여주던 포돌스키를 살려내지도 못했다. 결국 현역 시절 레전드급 선수라 할지라도 명 지도자까지 되기는 어렵다라는 걸 이 쪽도 몸소 증명한 예시 중 하나가 되었다.
뮌헨은 의외로 반 할이 오기 전까지 여전히 매우 고전적인 축구를 펼쳤는데, 믿을 구석은 지난 시즌 독일을 집어 삼키며 유럽 무대 어느 팀에 견주어도 부럽지 않았던 루카 토니 - 미로슬라프 클로제 라인에 크랙으로 리베리가 있었다. 전술이라고는 후방에서 뻥 차놓으면 토니가 몸빵으로 받아내서 클로제랑 골 만들어주겠지&리베리가 알아서 하겠지+제 호베르투의 기동력과 슈슈, 알틴톱의 뜬금포 등이 주 전술이었다. 이는 히츠펠트가 2000년대 초반 슈테판 에펜베르크의 뻥축 패스로 지오반니 에우베르나 카르스텐 얀커가 마무리를 하던 시절에서 크게 진보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07/08 시즌 때는 유럽무대에 내놓지 못해 한이었던 그 둘이 막상 유럽에 내놓으니 08/09 시즌,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번갈아서 부상을 당하기 일쑤여서 동시 가동이 잘 안 됐고, 에이스 프랑크 리베리도 부상으로 시즌의 40% 정도는 날려먹었으며, 무엇보다도 믿었던 유망주 수비진들은 빌드업도 안 되고 멘탈관리도 안 되는 폭탄들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 어린이들의 멘탈을 잡아준 대선배 올리버 칸은 07-08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해서 떠났고, 그 자리엔 기름손 of 기름손 렌징이 있으니 뭐가 되겠는가? 결국 08/09 시즌은 뮌헨빠들에게는 기억도 전혀 하기 싫은 최악의 흑역사+금지어 시즌 중 하나로 남았다.
10. 루이 판할 시대 !!
루이 판 할 감독이 부임한 2009-10 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볼프스부르크에게 빼앗긴 우승컵을 되찾아오기 위해 아르옌 로번, 마리오 고메스등을 대거로 지르는 등 2007-08 시즌 때에 이어 분노의 영입 시즌 2를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준우승을 기록하고, 분데스리가와 DFB - 포칼을 우승하며 더블을 기록한다. 같은 더치 커넥션이었던 마르크 반 봄멜에게 주장완장을 맡길 정도로 신임했던 루이 판 할은 마르크 반 봄멜 -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중원 라인 구성에 로베리라 불리는 세계 최강의 황금 날개를 만들어냈고, 유스 출신인 토마스 뮐러의 1 - 2선을 오가는 활용의 극대화, 홀거 바트슈투버, 디에고 콘텐토등의 발굴을 통해 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애매함으로만 남았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중앙미드필더로의 보직 변경은 신의 한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상황이 좋은건 아니었다. 시즌 초반엔 리그에서나 챔스에서나 인테르로 간 루시우,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이르다면 이른 나이에 은퇴한 윌리 사뇰 등의 공백으로 꽤 부진하여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샀으나 아르옌 로벤과 프랑크 리베리 없이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유벤투스를 4 - 1로 꺾는 쾌거를 올리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물론 우승 레이스를 펼치던 샬케 04와 베르더 브레멘이 바이에른 뮌헨이 진 라운드에서 함께 패해주는 등 운이 따라주기도 했으나, 결국 전반기를 4위로 마쳤음에도 역전에 성공하여 샬케 04와의 치열한 우승경쟁 끝에 승점 5점차로 제치고 22번째 분데스리가 우승을 확정했고, DFB-포칼 결승전에서도 베르더 브레멘을 4 - 0으로 누르며 더블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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