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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팀 역사

세리에A 최고 명문팀 유벤투스의 역사 1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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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벤투스 창단

 

유벤투스의 창단은 18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리노의 세 고등학생이 한 벤치에서 영국과 그들이 살던 토리노에서 한창 대유행이던 축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구단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와 만들게 된 것이 구단 창단의 계기이다. 13명의 공동 창립자 중 에우제니오 칸파리(Eugenio Canfari)가 초대 구단주를 맡았는데, 당시 그는 고등학생 신분이었다. 1년 후 형인 엔리코 칸파리(Enrico Canfari)가 구단주 자리를 이어받아 3년간 역임하였다. '젊은이들'을 뜻하는 클럽명 유벤투스는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창설한 클럽이라는 역사로부터 비롯되었다.

1905년 첫 우승을 차지하였으나, 당시 구단주이던 알프레드 딕(Alfred Dick)이 승부에 집착하는 구단 운영 방향에 환멸을 느껴 반대파를 이끌고 새로운 클럽을 창설하게 된다. 이 클럽이 현재 유벤투스와 지역 라이벌 관계에 있는 토리노 FC이다. 이후 첫 우승 시 핵심 플레이어로 활약했던 카를로 비토리오 바레티(Carlo Vittorio Varetti)를 비롯한 몇 명의 구단주를 거치며 고전하였으며, 이후 다시 우승을 차지한 것은 1925-26 시즌이 되어서였다.

 

 

2. 세리에 A  개편 및 국내 강자로의 부상, 첫 전성기 !!

 

1929년 세리에 A가 프로화 되면서 라운드로빈 토너먼트 형태로 개편되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제노아 CFC가 9회 우승, FC 프로 베르첼리 1892가 7회 우승으로 양강을 이루고 있었고, 유벤투스 2회, AC 밀란 3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회 등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강호들은 그다지 강한 면모를 보이지 못하였다.

이렇게 초창기에 비틀대던 유벤투스가 도약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엑소르 피아트를 이끌고 있는 아넬리 가문과 관계를 맺게 되면서부터이다. 1923년 피아트 그룹 창립자의 아들인 에두아르도 아넬리가 구단주로 취임하여 모기업의 돈을 클럽에 투자하면서 유벤투스는 강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리그 개편 후 첫 우승은 인테르가 차지하였으나, 그 다음 시즌부터 유벤투스는 리그 5연패를 달성하며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당시 유벤투스 선수들은 1934년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월드컵에도 다수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우승을 거두면서 이탈리아가 세계 축구계에서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골키퍼 잔피에로 콤비, 하프백 루이스 몬티, 아웃사이드 레프트 라이문도 오르시는 전경기에 출전하였다.

하지만 영원한 강자는 없는 법인지, 5연패 당시 레전드들의 은퇴 이후에 유벤투스는 침체기를 겪게 된다. 5연패 이후 몇 차례 볼로냐 FC와 인테르가 우승을 주고받은 뒤 토리노가 리그 5연패를 차지하며 그란데 토리노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1949년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가 추락하는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1968년 홈에서 열린 유로 우승까지 이탈리아 축구계는 침체기를 맞게 된다. 이후 세리에 A는 유벤투스-밀란-인테르의 트로이카 체제로 굳어져 1950년 이후로는 거의 이 세 클럽이 우승을 나누어 먹듯 하였다.

 

 

3. 보니페르티 시대 .. 유럽 최고의 구단으로의 성장, 두번째 전성기 

 

 

유벤투스는 잠피에로 보니페르티를 회장으로 선임하고 1970년대부터 밀란-인테르와의 우승 횟수 격차를 벌려 나가기 시작하면서,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이 부임한 1976-77 시즌 UEFA컵을 차지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시작, 유럽 수준의 강팀으로서의 면모를 구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유럽 축구는 요한 크루이프 프란츠 베켄바워 등이 이끈 토탈 풋볼이라는 거대한 전술적 흐름으로 이탈리아 전통의 카테나치오는 경쟁력이 없어지고 사장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탈리아 클럽은 유럽 대항전에서 좋은 성과를 못 내고 있었다. 이에 회장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조반니 트라파토니는 토털 풋볼의 혁신성과 고전적인 카테나치오를 융합하는 장기적인 전술적 프로젝트와 이에 따라 대대적인 유망주 발굴과 유망주 중심으로 팀을 구성한다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카테나치오와 토탈 풋볼의 혼합 전술이 바로 조나 미스타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주세페 푸리노, 로베르토 베테가, 파올로 로시 등 유스 출신 플레이어들을 발굴했고, 타 팀으로부터 가에타노 시레아, 안토니오 카브리니, 클라우디오 젠틸레, 마르코 타르델리, 프랑코 카우시오 등 플레이어들을 영입하면서 탈바꿈에 성공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크게 기여했는데, 발굴한 유망주들은 국가대표팀에서 볼로코-유베라는 별명을 가지고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의 이탈리아 우승 주역이 되었다. 결승전 선발의 8명이 유벤투스 선수였으니 이 프로젝트가 이탈리아 전반에 얼마나 거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이후 1980년대 들어 발롱도르 및 리그 득점왕 3연속 수상에 빛나는 미드필더 미셸 플라티니가 입단하면서 유벤투스는 세계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우뚝서게 된다. 1983-84 시즌 UEFA 컵위너스컵에 이어 1984-85 시즌 유러피언 컵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UEFA가 개최하는 모든 유럽 대항전 대회를 최초로 우승하는 위업을 달성하였고, 이를 기리기 위해 1988년 UEFA에서는 UEFA 플라크라는 기념패를 수여하였다.

 

 

 

4. 리피 시대 - 세계 최강의 구단, 세번째 전성기

 

이러한 침체기를 이겨내고 다시 한 번 유벤투스에 전성기를 가져온 감독이 마르첼로 리피이다. 리피 감독이 부임한 1994-95 시즌 9년만에 스쿠데토를 되찾아온 것을 비롯, 4년의 기간 동안 유벤투스는 스쿠데토 3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3회 연속 진출하여 우승 1회, 준우승 2회를 차지하였고, 이는 플라티니 시절을 뛰어넘는 클럽 최고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1999년 UEFA 클럽 랭킹을 보면 2위의 약 1.3배 포인트를 획득했는데, 이 정도로 압도적인 1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허나 당시 AS 로마 감독이었던 즈데넥 제만의 의혹 제기로 인해 약 7년 반에 걸친 조사 및 법정 싸움을 겪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유벤투스 금지약물 복용 의혹 항목에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거듭되는 유럽 대항전 및 월드컵으로 인한 체력 부족, 에이스 알레산드로 델피에로의 무릎 부상 및 위 사건의 여파로 인해 1998-99 시즌을 7위로 부진하게 마친 유벤투스는 리피 감독을 카를로 안첼로티로 교체하고 기존의 델피에로, 필리포 인자기, 지네딘 지단, 에드가 다비즈, 안토니오 콘테, 알레시오 타키나르디, 치로 페라라, 파올로 몬테로, 잔루카 페소토, 마크 율리아노 등에 에드윈 반 데 사르, 잔루카 잠브로타 등을 보강, 완벽에 가까운 팀을 완성하며 7공주 중 일약 우승 후보로 도약하였다. 그러나 1999-2000 시즌은 마지막 경기를 AC 페루자에게 내주며 SS 라치오에 역전 우승을 허용하였고, 2000-01 시즌은 전성기의 프란체스코 토티를 내세운 AS 로마가 내내 선두를 지켜 리그 우승도 실패,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는 충격을 맞는다. 당시 지단은 2006년 월드컵 결승 예고편을 선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다비즈의 금지약물 검출 및 출장 정지로 인해 팀 전술 수정이 불가피해진 유벤투스는 다시 리피로 사령탑을 교체, 지단과 인자기, 반 데 사르 등을 팔고 SS 라치오에서 파벨 네드베드, 마르셀로 살라스 파르마 FC에서 잔루이지 부폰 릴리앙 튀랑 등을 영입하는 역대급 이적시장 행보를 보인 끝에 탄탄한 팀을 만드는 데 성공하여 다시 우승을 차지하였다. 리피는 그 뒤로도 2002-03 시즌 리그 우승과 네드베드의 눈물로 유명한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거두었다. 이 팀을 파비오 카펠로가 이어받아 이탈리아 대표팀 주장 파비오 칸나바로, 세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에메르송, 그리고 유로 2004에서의 활약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린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까지 영입하며 다시 유럽을 제패하기 위해 팀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었는데...

 

 

4. 칼치오폴리와 그 이후

 

칼치오폴리 스캔들로 2004-05 시즌 우승은 공석, 2005-06 시즌 우승은 인테르에게 넘어갔고, 감독 포함 구성원의 상당수가 이적을 했다. 베스트11 중에 6명이 떠났는데 사이좋게 두 명씩 빅클럽으로 갔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파트리크 비에이라는 인테르로, 릴리앙 튀랑 잠브로타는 바르셀로나로, 파비오 칸나바로 에메르송 파비오 카펠로 감독과 함께 레알 마드리드로 향했다. 팀에 남은 선수는 델피에로, 네드베드, 부폰, 트레제게, 제비나, 카모라네시, 키엘리니, 비린델리 정도...

참고로 강등되었던 클럽을 다시 1부 리그로 끌어올린 데샹 감독은 승격 직후 EPL처럼 자신에게 전권을 주길 바랬으나 이것이 거부당하자, 그대로 사임을 하고 유벤투스를 떠났다. 그 후 클라우디오 라니에리가 감독으로, 그는 2007-08 시즌을 3위로 마치며 유벤투스의 실질적인 시즌 목표인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했다. 라니에리의 유벤투스는 2007-08 시즌 리그에서 인테르, 밀란, 로마 등의 강팀들과의 대결에서 각각 1승 1무를 기록하며 유벤투스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2008-09 시즌 챔피언스리그 예선에서 슬로바키아의 아르트메디아 페트르잘카를 꺾고 3년만에 복귀한 챔피언스리그 본선 복귀에 성공했다. 라리가 우승팀 레알 마드리드와 UEFA컵 우승팀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한 조가 되는[8] 힘겨운 조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홈어웨이 2승을 거두면서 조1위로 통과해 성공적인 복귀를 알렸다.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는 첼시 FC를 만나 1차전 원정 0-1 패배 후 2차전 홈에서 2-2로 비기며 탈락했다. 하지만 시즌 중 보여준 잦은 실책과 비난 여론에 의해 결국 시즌 종료까지 2경기나 남은 상황에서 라니에리 감독이 경질되었다. 이는 팀의 대들보 중 하나였던 트레제게와 팀 내 최고로 각광받던 유망주인 조빈코를 잘 기용하지 않는 용병술이 팬들의 반발을 초래했고, 거기에 더불어 만족스럽지 못한 리그 성적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여담으로 이해 영입된 유벤투스 최악의 먹튀 아마우리가 전반기에는 기대치에 걸맞게 그나마 사람다운 경기력을 펼쳤다.

치로 페라라가 잔여 2경기 동안 임시감독을 맡아 전승을 거두며 유벤투스는 AC 밀란을 제치고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후 역사는 유벤투스 역사 2탄에서 알아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