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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팀 역사

함부르크 SV 의 역사를 알아보자 제 1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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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단 및 역사 

 

독일 2. 분데스리가 (2. Bundesliga)에 소속된 프로축구 클럽으로, 1887년 9월 29일에 창단되었다. 2017년까지 분데스리가 원년 소속 클럽 중 유일하게 강등 경험 없이 쭉 참가해왔던 클럽이었다. 독일어 발음으로는 HSV (하에스파우) 라고 불린다. 현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부진으로 쌓아올린 명성이 무너지고 있는 클럽.

오랜 역사를 지닌 명문 클럽으로, 연고지는 함부르크. 정식 명칭은 함부르거 슈포르트-페어라인 (Hamburger Sport-Verein, 함부르크 스포츠사단법인)이고, 줄여서 HSV라고도 한다. 팀의 애칭은 로트호젠 (Rothosen, 빨간 바지).[12]

독일의 많은 축구 클럽들과 마찬가지로, 종합 스포츠 클럽이다. 축구팀 외에 복싱, 탁구, 나인핀스볼링 (nine pins bowling), 배드민턴, 야구, 볼링, 핸드볼, 하키, 어린이체조, 육상, 럭비, 수영, 테니스, 인라인하키, 아이스하키, 댄스, 당수(唐手)팀이 있다. 핸드볼 팀은 윤경신이 뛰기도 했다.

 

공식적인 창단일인 1887년 9월 29일은 훗날 HSV를 이루게 되는 세 팀들 중 가장 먼저 창단된 SC 게르마니아라고 하는 팀의 창단일로, 1919년 6월 1일에 SC 게르마니아, 함부르크 FC, FC 팔케 (FC Falke)의 세 팀이 합병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2. 화려한 전성기

 

1978년부터 1983년까지 6시즌 동안 함부르크 SV는 분데스리가 최고의 강팀이자, 유럽을 대표하는 강팀으로 군림했다. 이 6시즌 동안 함부르크는 분데스리가 3회 우승 및 3회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 컵 우승(1983년) 및 준우승(1980년)을 차지하고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했으며, UEFA 유로파 리그의 전신으로 당시에는 권위가 높았던 UEFA컵에서 준우승(1982년)을 거두는 등 유럽 대회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영광의 시기를 보냈다.

이 시절 브란코 제베치 감독과 에른스트 하펠 감독이라는 두 명장의 지휘 아래 케빈 키건[13], 펠릭스 마가트, 만프레드 칼츠, 호르스트 흐루베슈 등이 활약했다. 특히 케빈 키건은 1978년, 79년 2년 연속 발롱도르를 차지했다. 이전까지 분데스리가를 양분하던 강팀인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전성기가 끝나며 세대 교체기에 접어들 당시 곧바로 함부르크가 그 자치를 차지하며 70년대말부터 80년대 전반기까지 분데스리가의 최강팀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뮌헨이 칼 하인츠 루메니게를 중심으로 팀을 제 정비하여 도전해 왔다. 70년대말 한때 경륜의 뮌헨에 밀리는 듯 하였고, 설상가상으로 키건이 잉글랜드로 돌아가려는 열망이 강해 결국 사우스햄튼 FC로 이적했다. 하지만 함부르크의 진정한 전성기는 키건 이적 이후에 찾아왔다. 1980년부터 1983년 사이 함부르크는 2년 연속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했고 유러피언 컵에서는 1980년에는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1983년 마침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UEFA컵에서도 1982년 준우승을 차지했다.

참고로 미국에서 뛰던 카이저 베켄바우어가 이 시절 함부르크에 입단하며 분데스리가에 복귀했고 함부르크가 바이에른 뮌헨을 꺾고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하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이미 끝물이 지난 베켄바우어는 함부르크에서 풀주전은 아니었고 로테이션 멤버로 기용되었다.

하지만 1984년 이후 다시 분데스리가 정상에 등극한 바이에른 뮌헨에 밀리기 시작했고, 1987년 DFB-포칼에서 우승 및 분데스리가 준우승을 차지한 것을 끝으로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하였고 1990년대에는 중위권을 유지해왔다.

이후 토마스 돌감독을 선임하고 빅네임이었던 라파엘 반 더 바르트를 영입한 2005-06시즌 시즌에는 21승 5무 8패를 기록하며 3위를 차지하며 6년만에 UEFA 챔피언스리그에 나갔다. CA 오사수나를 플레이오프에서 꺾고 진출한 챔피언스리그 본선에서 아스날 FC, FC 포르투, CSKA 모스크바를 상대로 1승 5패에 그치며 최하위에 그쳤다. 리그에서는 전반기 단 1승에 그치며 강등 위기에 몰리며 후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토마스 돌이 경질되었고 휘프 스테번스 체제에서 후반기에 180도로 반등하며 6위로 마쳤다.

2007-08 시즌에는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마르틴 욜이 감독이었던 2008-09 시즌에는 분데스리가-DFB 포칼-UEFA컵 트레블에 도전했으나 라이벌인 베르더 브레멘을 승부처인 4~5월에 연달아 만나는 일정에서 모두 패하여 무관에 그쳤고 리그에서도 간신히 5위로 유로파리그 진출에 그쳤다.

 

 

3. 부진의 늪..

 

이사진 내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운영이사회장 베른트 호프만이 팀을 운영하던 21세기 초반에는 유러피언 클럽 대항전에 자주 모습을 보이던 팀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 즈음 어려움을 겪으며 컵 대회에 나가지 못하기 시작하자 결국 호프만이 물러나고 첼시에서 스카우팅 및 유스 담당 디렉터로 일하던 프랑크 아르네센이 새로이 합류했다. 그는 본인의 친정인 첼시 FC의 2군 유망주, 특히 수비 자원들을 임대 혹은 완전 영입하며 리빌딩에 나섰는데 태반이 거품들이라 결국 수비진이 완전히 붕괴됐다. 아울러 비슷한 시기 팀에 활력을 불어넣겠답시고 제 호베르투등 베테랑들을 대폭 내보낸 것이 팀이 흔들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결국 아르네센은 2013년 물러났고팀은 2013-2014 시즌부터 승강 플레이오프에 나가게 됐다. 2014-2015 시즌까지 승강 플레이오프를 겪었고, 그 후 2015-2016 시즌 중위권에 머물고, 2016-2017 시즌엔 턱걸이 잔류에 성공했다. 이사회의 일원으로 투자하는 팬이라는 미명하에 구단 운영에 간섭을 해오던 미하엘 퀴네의 영향력이 커지고 유스 시스템을 결집하려던 HSV 캠퍼스건립이 지연되는 등 여러모로 힘들다. 결국 샬케 04의 단장을 지낸 옌스 토트 단장을 영입해 리빌딩을 시도하며 조나단 타, 얀피에테 아르프 등을 키워 냈지만 팀은 결국 2017-18 시즌 17위로 강등당하며 이 리빌딩 시도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나머지 역사는 2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