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란바람의 시작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909년 12월 19일 트리니티 유스의 불만이 많은 18명의 젊은이들에 의해서 창단되었다. 도르트문트에는 성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 클럽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그들은 지역 청년들의 진취적인 바람을 다 수용할 수 없었고, 18명의 젊은이들은 트리니티 유스를 떠나 구기 클럽 보루시아 09 도르트문트(Ballspiel-Verein Borussia 09 e. V. Dortmund)를 창단하였다.
그렇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란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들의 축구 클럽을 갖게 된 젊은이들은 향후 차분한 걸음으로 명문 클럽으로의 도약을 꿈꿨다. 보통 젊은 혈기에 의해 건설된 클럽 대부분은 곧바로 리그에 참가하기 위해 전력 보강을 시도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도르트문트는 전국 리그(지금의 분데스리가)에 참여하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다. 대신 지역 리그에 주로 참여해 명문 클럽으로 가는 초석을 닦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결정은 젊은 혈기에 치우치지 않고 차분히 클럽의 미래를 건설하고자 했던 마음에서 나온 것이였다.
물론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작용하기도 했다. 언급했던 도르트문트는 젊은이들에 의해 창단된 클럽인데, 그러다보니 재정적 자립도가 약할 수밖에 없었고,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클럽을 만들었던 탓에 투자를 하려는 사람들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또 창단 후 10년 정도가 지난 1920년대에는 적극적인 스폰서 유치로 인한 클럽의 덩치 키우기에 도전했으나, 이 역시 경험 부족으로 인해 참담한 실패만 맛본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당시 도르트문트의 도전은 클럽 파산 위기의 원인이 되는데, 자칫 클럽이 사라질 수도 있었던 극심한 재정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처음 그들이 보여준 진취적 바람에서 나왔다.
지역 주민들은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는 도르트문트를 그대로 망하게 두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젊은 사람들이 올바른 축구 클럽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던 그들의 건강한 초심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르트문트의 팬들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건강한 클럽을 만들어주길 당부하며 도르트문트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런 서포터들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은 도르트문트는 클럽의 간판을 내려야 할 위기를 간신히 극복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역 주민들의 도움으로 큰 위기에서 벗어난 도르트문트는 본격적으로 비상을 준비했다. 20여 년 동안 지역 리그에서 갈고 닦은 실력에다 큰 실패로 인한 교훈, 여기에 지역민들의 깊은 사랑까지 두루 얻은 도르트문트에게 성공은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그들을 괴롭혔다. 1930년대 독일은 물론 유럽 전역을 뒤흔든 나치즘때문이었다. 극도의 전체주의 정당이었던 나치즘은 독일 내 모든 스포츠 및 운동 단체들에게 “우리의 목표에 맞게 팀을 운영하라”라는 간결하면서도 섬뜩한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정권 선전 도구로 스포츠를 이용한 것이다.
이는 축구 클럽인 도르트문트도 예외일 수 없었다. 도르트문트는 나치즘의 그런 권고를 무시해 당에 가입하지 않는 등 항전의 자세를 취했고, 그런 도전은 성난 나치즘으로 하여금 클럽 경영진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큰 생채기를 남기게 하고 말았다. 이후엔 클럽 내부에서 나치즘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색출하는 작업이 계속됐고, 그렇게 색출된 사람은 공개 처형을 당하는 등 클럽 내 어두운 그림자가 계속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게 팀이 커다란 혼란에 흔들렸으니 선수들은 물론 도르트문트를 응원하는 팬들까지도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도르트문트에도 희망의 빛이 깃들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도르트문트는 나치즘 초창기 가입을 거부하고 항전했다가 클럽 경영진이 송두리째 바뀌어 나치즘 신봉자들이 클럽의 실권을 장악하게 됐는데, 바로 이 문제가 세계대전 종료 후 연합군들에게 또 다른 명분을 제공했다. 연합군은 당시 독일 내 나치즘의 잔재를 몰아내는 데 힘을 쏟았는데, 클럽 경영진과 직원 대부분이 나치즘이었던 도르트문트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 클럽이 해체당한 것이다. 다행히 주변에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클럽들과 합병해 그럭저럭 명맥은 이어갈 수 있었지만, 원하지도 않았던 나치즘으로 인해 수십 년의 암흑기를 거치게 된다.
2. 독일을 물들인 노란 바람
하지만 그러한 위기는 도르트문트를 강팀으로 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 1940년대 말 도르트문트는 이전과는 몰라보게 강한 팀으로 발전했다. 이유는 연합군에 의한 강제 해체 후 클럽 합병 때문이었다. 당시 도르트문트는 주위 두 개 클럽과 합병에 가까운 상생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연합군의 제재 후 도르트문트 출신의 경영진들이 가장 빨리 현장 1선에 복귀해 팀을 재건시켰고, 이 과정에서 세 팀의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팀을 재창단할 수 있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팀 전체의 전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고 아울러 베스트팔렌주는 물론, 전국 리그에 나가서도 손색없는 전력을 자랑할 수 있게 된다!
한층 높아진 전력을 보유하게 된 도르트문트는 그때 당시 베스트팔렌 지역 최강으로 꼽히던 샬케04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레비어 더비라 불리며 독일 내 최고의 더비 매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 바로 이 시기다. 그렇게 승승장구를 시작한 도르트문트는 1947-48시즌 샬케04를 물리치고 베스트팔렌 지역을 대표해 전국 챔피언십에 참가하게 됐다. 처음으로 전국 대회의 맛을 알게 된 도르트문트는 다음인 1948-49시즌에도 베스트팔렌 지역을 대표해 전국 챔피언십에 출전했는데, 이때는 결승까지 오르는 괴력을 발휘하며 그 이름을 독일 전역에 알렸다. 그렇게 조금씩 베스트팔렌 지역을 넘어 독일 전역에 존재감을 과시하던 도르트문트는 꾸준한 강세를 보였고, 결국 1955-56시즌에는‘도이치 마이스터’란 이름 아래 창단 첫 독일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다음 해 디펜딩 챔피언의 자격으로 출전한 1956-57시즌 또 한 번 결승전에 진출했고 함부르크와의 맞대결 끝에 4-1이란 넉넉한 스코어로 우승을 차지, 대회 2연패란 금자탑을 세웠다. 이후 1962-63시즌에는 쾰른을 상대로 한 결승전에서 3-1로 승리하며 대회 통산 세 번째 우승을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로 이 대회는 1963-64시즌부터 시작된 분데스리가 전 마지막 전국 챔피언십이었는데, 도르트문트는 대회의 마지막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대미를 장식한 클럽으로 남게 됐다 . 베스트팔렌 지역에서만 조용히 불던 노란 바람이 마침내 전 독일을 물들인 순간이었다.
이 때에 도르트문트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 출전하여 우승하게 되는데, 이 우승은 독일 클럽이 유럽 대항전에서 거둔 첫 우승이 된다.
3. 첫번째 몰락과 힘겨운 시기들..
분데스리가 출범 후 도르트문트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강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도르트문트는 당시 팀 내 넘버 원 골잡이였던 프리드헬름 코니츠카를 선두에 내세워 유수의 강호들과 대등한 싸움을 했고, 젊은 청년들의 혈기에 의해 창단된 축구 클럽은 나치즘과 세계대전이란 후유증을 잘 이겨내고 독일 내 명문 클럽으로 빠르게 자리 잡는듯 했다.
그렇게 순조로운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도르트문트는 처음 맛보는 성공에 취해 방만한 클럽 운영을 하게 되는데,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과 분데스리가에서의 선전으로 지금껏 만져보지 못했던 막대한 자금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성공에 눈이 먼 클럽 경영진은 쓸데없는 지출과 무작위 선수 영입을 일삼아 순식간에 금고를 바닥냈고, 도르트문트의 재정상황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아직까지 경험한 적 없는 재정 위기와 마주친 도르트문트는 이후 급격한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했다. 팀의 주축 선수들이 자금이 바닥난 팀을 떠났고, 그것이 직접적인 충격파로 작용해 성적까지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거의 매년 분데스리가에서 두 자릿수 승수 이상을 기록하며 베스트팔렌 지역을 대표하는 축구 클럽으로 이름값을 했던 도르트문트였지만 1968-69 시즌 최종전 승리로 16위 턱걸이 잔류를 한 데 이어 1969-70 시즌 잠시 5위를 기록한 뒤 1970-71시즌엔 간신히 10승을 기록하며 또다시 13위로 급락하는 충격을 맛봤다. 그 다음 시즌인 1971-72시즌에는 6승을 올리는 데 그치며 급기야 2부 리그로 강등되는 최악의 상황에까지 직면했다. 2부 리그에서 혹독한 수련을 쌓은 끝에 1976-77시즌 다시 1부 리그로 돌아왔지만, 이후엔 항상 중위권에 턱걸이 하는 것에 머물렀었고, 심지어 1977-78 시즌 마지막 리그 경기였던 1978년 4월 29일에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2-0이라는 최악의 흑역사급 스코어로 대패한 적도 있을 정도로 초창기의 명성을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당시 독일은 바이에른 뮌헨을 중심으로 유럽을 제패했고 월드컵에서도 잇달아 좋은 성적을 기록해 전성기를 맞았는데, 도르트문트만은 그런 행복한 나날들과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1976-77 시즌 8위를 기록한 뒤 1977-78 시즌에는 위에서 언급한 0-12 대참사를 겪으며 11위로 마쳤고 1978-79 시즌에도 12위에 그쳤다. 1979년 여름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분데스리가 우승으로 이끌었던 우도 라테크를 감독으로 선임하였고 6위와 7위로 순위는 올렸으나 한끝 차이로 유럽대항전 진출에 실패했다. 그리고 우도 라테크 감독은 FC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라테크가 떠난 뒤 5년간 혼란기가 찾아왔다. 10명의 감독이 교체될 정도였다. 일단 1981-82 시즌은 함부르크 SV를 분데스리가 우승과 유러피언컵 준우승으로 이끈 브란코 제베치가 감독을 맡아 6위로 UEFA컵에 나가게 되며 1966년 이후 16년만에 유럽대항전 진출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제베치 감독은 알코올 문제로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고 카를하인츠 펠트캄프가 1982-83 시즌을 맡아 7위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 즈음에 재정 문제가 터졌고 클럽은 830만 마르크의 빚을 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도르트문트는 1983-84 시즌 13위로 처졌고 1984-85 시즌에는 최종전에서 우승에 도전했던 베르더 브레멘에 2-0 승리를 거두며 가까스로 14위로 분데스리가에 잔류했다.1985-86 시즌에는 급기야 16위로 마치며 SC 포르투나 쾰른과 강등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됐다. 1차전 원정에서 2-0 패배를 당했던 도르트문트는 2차전에서 전반 선제골을 실점한 뒤 후반 2골을 넣었지만 종료 직전까지 승부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는 득점이 나오지 않아 조마조마했던 순간에 위르겐 베크만의 기적적인 추가시간 득점으로 스코어를 3-3으로 맞추며 간신히 재경기로 끌고갔다. 그리고 중립구장에서 치러진 재경기에서 8-0 대승을 거두며 가까스로 생존에 성공했다.
그런 도르트문트에게도 1974년 서독이 개최한 월드컵은 어느 정도 콩고물을 떨어트려줬다. 도르트문트가 월드컵 개최 도시로 선정되어 5만 4천석의 신구장 베스트팔렌 슈타디온을 신축하게 된 것이다. 물론 멋들어진 홈 경기장을 새로 받았다고 해서 당장 도르트문트가 재기한 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창단 초기 몰락해가던 도르트문트를 구했던 지역 주민들의 사랑은 여전했고, 그 사랑이 채워질 수 있는 드넓은 홈 경기장을 가졌다는 것은 도르트문트가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도르트문트는 어렵게 주어진 그 발판을 허투루 밟지 않았다.
1986-87 시즌에는 프랑크 밀, 놀베르트 디켈, 토마스 헬메르를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고 라인하르트 자프티히 감독 아래 전년도 16위에 강등에서 겨우 탈출한 팀은 4위로 마치며 UEFA컵에 진출했다. 1987-88 시즌 리가는 13위에 그쳤지만 UEFA컵에서 셀틱과 벨레주 모스타르에 승리하며 16강에 진출했다. 1988-89 시즌을 앞두고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유망주 안드레아스 묄러, 바이에른 뮌헨의 미하엘 루메니게가 입단했다. 자프티히 감독은 시즌 초 주장과 불화를 겪으며 사임하여 호르스트 쾨펠이 감독이 되었다. 리가는 7위로 마무리했으나 DFB 포칼 결승에서 베르더 브레멘을 4-1로 꺾고 클럽 역사상 두 번째 DFB-포칼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4. 유럽에 퍼지는 노란 바람
DFB-포칼과 독일 슈퍼컵을 차지하며 더블을 달성한 도르트문트는 본격적인 비상을 시작했다. 1991-92시즌 명장 오트마어 히츠펠트를 감독으로 선임, 스위스 최고의 스트라이커 스테판 샤퓌자 등을 앞세워 분데스리가 준우승을 차지한 후 1992-93시즌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권위 있었던 UEFA컵에서 준우승까지 달성하게 된다. UEFA컵에서의 선전으로 독일축구협회는 이례적인 상금 2억 5천만 마르크를 도르트문트에게 지급했는데, 이 돈으로 도르트문트는 빅 클럽으로의 도약에 가속을 붙일 수 있게 됐다. 독일축구협회는 이 돈을 도르트문트에 지급하며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팀에게 주기 위해 마련한 포상금이다”라고 밝혔는데, 1970년대 유럽을 호령한 바이에른 뮌헨 이후 독일 클럽들이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자(...) 당근으로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
뜻밖의 거액을 손에 쥔 도르트문트는 이전처럼 방만한 운영으로 거액을 날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1970년대 겪어야 했던 암흑을 경험 삼았기 때문인데, 도르트문트는 적절한 투자로 유망한 선수들을 영입하는 동시에 클럽의 재정 자립도를 더욱 튼튼하게 하기 위해 거액을 계획적으로 사용했다. 그 결과 카를하인츠 리들레, 위르겐 콜러, 외르크 하인리히, 마티아스 잠머, 안드레아스 묄러, 슈테판 로이터, 라르스 리켄, 파울루 소자, 폴 램버트 등 당시 유럽 축구에서 이름 꽤나 날리던 선수들을 대거 영입할 수 있었고, 이들을 바탕으로 하여 도르트문트는 유럽 무대에 본격적인 명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중 절정은 1994-95시즌부터 1996-97시즌까지였다. 히츠펠트 감독은 특유의 뚝심 있는 지도력으로 도르트문트를 조직적으로 강한 팀으로 조련시켰는데, 개인보다 팀을 더 중시했던 그의 지도 철학은 많은 스타 선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르트문트가 잡음 없이 굴러갈 수 있도록 큰 힘을 보탰다. 게다가 도르트문트 로컬유스 출신에다 주장인 미하엘 초어크의 존재는 구심점이 되어 선수들을 잘 이끌어주었다. 스타 플레이어와 조직력을 두루 갖춘 도르트문트는 해당 시즌 독일 분데스리가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전국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분데스리가 정상 등극은 처음이었는데, 다음 시즌인 1995-96시즌에도 분데스리가 정상에 서며 리그 2연패를 달성한다. 같은 기간 독일 슈퍼컵까지 휩쓴 도르트문트는 2년 연속 더블이라는 진기록까지 달성하며 독일 최고 클럽으로 급부상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정점에 있는 업적은 1996-97시즌 달성한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다. 도르트문트의 이 대회 우승이 특히 더 깊이 뇌리에 남았던 것은 뮌헨 올림피아슈타디온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마주친 상대가 4년 전인 1992-93시즌 UEFA컵 결승에서 패배를 안겨준 유벤투스였기 때문이다. 당시 유벤투스는 프랑스 아트 사커의 지휘관인 지네딘 지단이 이끌고 있었는데, 도르트문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3-1로 승리하며 4년 전 UEFA컵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는 동시에 클럽 역사상 최초로 빅 이어까지 품는 영광을 안았다.[16] 또한 그것을 더해 그해 겨울에는 남미 클럽 우승팀과 격돌하는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남미 챔피언 크루제이루(브라질)를 격파하며 세계 최고의 클럽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당시의 도르트문트는 인기, 자금력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맞설 수 있었던 유일한 클럽이었다.
그 기세를 연달아 1997-98 시즌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도르트문트와 바이에른 뮌헨이 격돌하게 되었는데, 분데스리가 클럽이 챔피언스리그에서 맞붙은것은 이 두 구단이 최초였다. 여기서 도르트문트가 연장끝에 뮌헨을 1:0으로 꺾고 준결승에 진출하면서 뮌헨의 대항마라는 입지를 가지게 되었다.
나머지 역사는 2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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